모치히토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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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치히토 왕은 고시라카와 천황의 아들로, 헤이케 타도를 목표로 거병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인물이다. 그는 뛰어난 학문과 예술적 재능을 갖췄으나, 왕위 계승 경쟁에서 밀려났다. 지쇼 3년의 정변 이후 조코지 영지를 몰수당하며 헤이케에 대항할 명분을 얻었고, 1180년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의 권유로 헤이케 타도를 명하는 영지를 내려 반 헤이케 무장 봉기를 획책했다. 그러나 계획이 누설되어 황족 신분을 박탈당하고 유배되었다. 이후 온조지로 도망쳐 요리마사와 합류했으나, 결국 헤이케 추토군에게 쫓겨 사망했다. 그의 영지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등 겐지 세력의 봉기를 촉발하여 헤이케 멸망의 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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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치히토 왕 | |
---|---|
기본 정보 | |
이름 | 이인왕 |
다른 이름 | 모치히토 왕 |
로마자 표기 | Mochihito-ō |
![]() | |
출생 | 닌페이 원년 (1151년) |
출생지 | 야마시로 국 |
사망 | 지쇼 4년 5월 26일 (1180년6월 20일) |
사망지 | 야마시로 국 소라쿠 군 미나미야마시로 가와타가와라 |
아버지 | 고시라카와 천황 (제77대 천황) |
어머니 | 친모: 후지와라 시게코 (후지와라 스에나리의 딸) 양모 : 쇼시 내친왕 |
가계 | |
배우자 | 하치조인 뇨보 후지와라 타다나리의 딸 하치조인 산미노쓰보네 (고시나노 모리아키의 딸) 인푸몬인 지부쿄노쓰보네 |
자녀 | 첫째 왕자: 호쿠리쿠노미야 둘째 왕자: 도손 셋째 왕자: 신쇼 넷째 왕자: 도쇼 (안인노미야 소죠) 다섯째 왕자: 진요 왕녀: 산조노미야 히메미야 왕녀: 히메미야 |
경력 | |
신분 | 왕 → 신적강하 (고시라카와 겐지) |
역할 | 겐페이 전쟁의 시작을 알린 인물 |
2. 생애
고시라카와 천황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형 슈가쿠 법친왕이 불문에 들어갔기 때문에 둘째 아들로 알려졌다. 어머니는 후지와라 스에나리의 딸 나리코이며, 친누나로는 가인(歌人)으로 이름 높던 시키시 내친왕이 있었다.
어려서 덴다이좌주・사이운 법친왕의 제자로 들어갔으나, 1162년 사이운 법친왕이 죽자 환속하였다. 1165년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고노에가와라(近衛河原)의 오미야 고쇼에서 원복을 치렀다고 한다. 그 뒤, 하치조인 쇼시 내친왕의 유자(猶子)가 되었다.[1]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학문이나 시가, 특히 서예와 피리에 뛰어났고, 어머니의 친가인 칸인류 후지와라 씨(藤原氏)는 유력한 가문이었기에 한때 왕위 계승 후보였다. 하지만 이복 동생 노리히토 친왕(훗날의 다카쿠라 천황)의 생모이자 당시 권세를 누리던 헤이케 일문의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처제 다이라노 시게코(켄슌몬인)가 방해하여 무산되었다고 한다(《헤이케 이야기》). 그러나 이는 「인과응보」를 주제로 하는 《헤이케 이야기》의 윤색으로, 꼭 사실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2] 1166년에 큰외삼촌 후지와라 키미츠가 곤노주나곤(権中納言) ・ 사에몬노카미(左衛門督)에서 해임되고 실각되면서 모치히토 왕의 왕위 계승 가능성은 사라져 버렸다.[3]
1179년 11월,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쿠데타를 일으켜 고시라카와 법황을 유폐하고 간파쿠(関白) 마쓰도노 모토후사를 내쫓았다(지쇼 3년의 정변). 모치히토 왕도 오랫동안 소유해 오던 조코지 영지를 몰수당했다.[5][6]
1180년 4월, 헤이케 타도를 결의한 모치히토 왕은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의 권유로 일본 전국에 숨어 있던 겐지들에게 헤이케 타도 영지(명령)를 내려 반(反) 헤이케 무장 봉기를 계획했다. 스스로 '최승친왕'이라 칭하며 거병을 준비했으나, 계획이 사전에 헤이케 측에 누설되었다.[1]
1180년 5월 15일, 헤이케의 압력을 받은 조정은 칙명과 인젠(院宣)을 내려 모치히토 왕의 황적을 박탈하고 '미나모토노 모치미쓰'라는 이름으로 도사국으로 유배를 명했다. 그날 밤 게비이시(検非違使) 도키 미쓰나가와 미나모토노 가네쓰나(요리마사의 아들)가 모치히토 왕의 저택을 기습했지만, 이미 저택을 빠져나간 뒤였다.[1]
5월 16일, 모치히토 왕이 온조지(園城寺)로 달아난 것이 확인되었고, 21일에 헤이케는 온조지 공격을 결정했다. 헤이케는 모치히토 왕의 단독 모반으로 생각했기에 공격 대장에 요리마사도 포함되어 있었다.[1]
미나모토노 요리마사는 그날 자식을 데리고 온조지로 가서 모치히토 왕에게 합류했고, 온조지와 대립하던 엔랴쿠지(延暦寺)에 협력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온조지 안에도 헤이케 지지파가 많아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모치히토 왕과 요리마사는 난토(南都)로 가서 고후쿠지(興福寺) 등 현지 사원 세력과 합류하기로 했다.[1]
1180년 5월 26일, 요리마사가 우지에서 헤이케 군을 막는 사이 모치히토 왕은 고후쿠지로 향했지만, 미나미 산성(南山城)의 가와타(加幡) 강변에서 헤이케의 가신 후지와라노 가게타카, 이토 다다쓰나 등이 이끄는 추토군에 쫓겨 죽었다. 요리마사도 우지에서 아들 나카쓰나와 함께 싸우다 자결하였다.[1]
모치히토 왕이 실제로는 죽지 않고 도고쿠(東国)로 달아났다는 설도 있었다. 《구칸쇼》에는 왕자로 추정되던 시신의 목을 베어다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준 가운데 왕자의 학문 스승 후지와라노 무네나리가 왕자의 목이 맞다고 하였으며, 《헤이케 이야기》에는 모치히토 왕자의 총애를 받아 그의 아이까지 낳은 궁녀가 목 앞에 꿇어 앉아 통곡하는 모습을 보고 틀림없는 모치히토 왕자의 목임을 확인했다고 한다.[2]
2. 1. 유년 시절
고시라카와 천황의 셋째 황자로 태어났지만, 《헤이케 이야기》에서는 형 슈가쿠 법친왕이 불문에 들어갔기 때문에 둘째 황자로 알려졌다. 어머니는 후지와라 스에나리의 딸 나리코이며, 친누나로는 가인(歌人)으로 이름 높던 시키시 내친왕이 있었다.어려서 덴다이좌주・사이운 법친왕의 제자로 들어갔으나, 오호 2년(1162년) 사이운 법친왕이 죽자 환속하였다. 에이만 원년(1165년)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고노에가와라(近衛河原)의 오미야 고쇼에서 원복을 치렀다고 한다. 그 뒤, 하치조인 쇼시 내친왕의 유자(猶子)가 되었다.[1]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학문이나 시가, 특히 서예와 피리에 뛰어났고, 어머니의 친가인 칸인류 후지와라 씨(藤原氏)는 유력한 가문이었기에 한때 왕위 계승 후보였지만, 이복 동생 노리히토 친왕(훗날의 다카쿠라 천황)의 생모이자 당시 권세를 누리던 헤이케 일문의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처제 다이라노 시게코(켄슌몬인)가 방해하여 무산되었다고 한다(《헤이케 이야기》). 그러나 이는 「인과응보」를 주제로 하는 《헤이케 이야기》의 윤색으로, 꼭 사실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2] 특히 닌난(仁安) 원년(1166년)에 큰외삼촌 후지와라 키미츠가 곤노주나곤(権中納言) ・ 사에몬노카미(左衛門督)에서 해임되고 실각되면서 모치히토 왕의 왕위 계승 가능성은 사라져 버렸다.[3]
2. 2. 불우한 성장 과정
고시라카와 천황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헤이케 이야기》에서는 형 슈가쿠 법친왕이 불문에 들어간 কারণে 둘째 아들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는 후지와라 스에나리의 딸로 다카쿠라노 산미라 불렸던 나리코이다. 가인(歌人)으로 이름 높던 시키시 내친왕이 그의 친누나였다.어려서 천태좌주 ・ 사이운 법친왕의 제자로 들어갔으나, 오호 2년(1162년) 사이운이 죽자 환속하였다. 에이만 원년(1165년)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고노에가와라(近衛河原)의 오미야 고쇼에서 원복을 치렀다고 한다. 그 뒤 하치조인 쇼코 내친왕(八条院暲子内親王)의 유자(猶子)로 들어갔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학문이나 시가, 특히 서예와 피리에 뛰어났고, 어머니의 친가가 간인류 후지와라 씨(藤原氏)로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였지만, 이복 동생 노리히토 친왕(憲仁親王)의 생모이자 당시 위세 높던 헤이케 일문의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처제 다이라노 시게코가 방해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헤이케 이야기》). 다만 이는 「인과응보」를 주제로 하는 《헤이케 이야기》의 방편으로, 꼭 사실 그대로라고는 해석할 수 없다[1]는 반론도 있다.[2] 특히 닌난 원년(1166년)에 큰외삼촌 후지와라노 기미미쓰가 곤노주나곤(権中納言) ・ 사에몬노카미(左衛門督)에서 해관되고 실각되면서 모치히토 왕의 왕위 계승 가능성은 사라져 버렸다.
2. 3. 지쇼 3년의 정변
지쇼(治承) 3년(1179년) 11월,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쿠데타를 일으켜 고시라카와 법황을 유폐하고 간파쿠(関白) 마쓰도노 모토후사를 내쫓았다(지쇼 3년의 정변). 모치히토 왕도 오랫동안 소유해 오던 조코지 영지를 몰수당했다.[5][6] 여기에는 다카쿠라 천황 및 그 왕통에 대항하는 세력이었던 모치히토 왕자의 경제 기반을 무너뜨리려는 헤이케 정권의 의도가 있었다. 조코지 영지는 본래 사이운 법친왕이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모치히토 왕자가 이 영지를 이어받은 것도 그가 출가하여 사이운 법친왕의 법등을 이어받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모치히토 왕자는 출가하지 않고 속세의 사람으로써 그대로 이 영지를 소유했고, 그것은 당초의 영지 소유 조건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때문에 헤이케 정권은 이 점을 빌미로 조코지 영지를 몰수한 뒤 본래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던 「나시모토 몬제키」에게 반환한다는 명목으로 왕자로부터 이 영지를 몰수했던 것이다.2. 4. 모치히토 왕의 거병
1180년 4월, 헤이케 타도를 결의한 모치히토 왕은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의 권유로 일본 전국에 숨어 있던 겐지들에게 헤이케 타도 영지(명령)를 내려 반(反) 헤이케 무장 봉기를 계획했다. 스스로 '최승친왕'이라 칭하며 거병을 준비했으나, 계획이 사전에 헤이케 측에 누설되었다.[1]1180년 5월 15일, 헤이케의 압력을 받은 조정은 칙명과 인젠(院宣)을 내려 모치히토 왕의 황적을 박탈하고 '미나모토노 모치미쓰'라는 이름으로 도사국으로 유배를 명했다. 그날 밤 게비이시(検非違使) 도키 미쓰나가와 미나모토노 가네쓰나(요리마사의 아들)가 모치히토 왕의 저택을 기습했지만, 이미 저택을 빠져나간 뒤였다.[1]
5월 16일, 모치히토 왕이 온조지(園城寺)로 달아난 것이 확인되었고, 21일에 헤이케는 온조지 공격을 결정했다. 헤이케는 모치히토 왕의 단독 모반으로 생각했기에 공격 대장에 요리마사도 포함되어 있었다.[1]
미나모토노 요리마사는 그날 자식을 데리고 온조지로 가서 모치히토 왕에게 합류했고, 온조지와 대립하던 엔랴쿠지(延暦寺)에 협력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온조지 안에도 헤이케 지지파가 많아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모치히토 왕과 요리마사는 난토(南都)로 가서 고후쿠지(興福寺) 등 현지 사원 세력과 합류하기로 했다.[1]
1180년 5월 26일, 요리마사가 우지에서 헤이케 군을 막는 사이 모치히토 왕은 고후쿠지로 향했지만, 미나미 산성(南山城)의 가와타(加幡) 강변에서 헤이케의 가신 후지와라노 가게타카, 이토 다다쓰나 등이 이끄는 추토군에 쫓겨 죽었다. 요리마사도 우지에서 아들 나카쓰나와 함께 싸우다 자결하였다.[1]
2. 5. 최후
아무도 왕자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기 때문에, 모치히토 왕은 실제로는 죽지 않고 도고쿠(東国)로 달아났다는 설도 있었다. 《구칸쇼》에는 왕자로 추정되던 시신의 목을 베어다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준 가운데 왕자의 학문 스승 후지와라노 무네나리가 왕자의 목이 맞다고 하였으며, 《헤이케 이야기》에는 모치히토 왕자의 총애를 받아 그의 아이까지 낳은 궁녀가 목 앞에 꿇어 앉아 통곡하는 모습을 보고 틀림없는 모치히토 왕자의 목임을 확인했다고 한다.[2]이仁王의 거병도 참조.
스스로 "최상 친왕"이라고 칭하며 거병을 시도했지만, 준비가 갖춰지기 전에 계획이 헤이시(平氏) 측에 새어나갔다. 1180년 5월 15일, 헤이시의 압력에 의한 칙명과 원선으로 이仁王은 황족 신분을 박탈당하고, 겐 씨를 하사받아 "미나모토노 모치미쓰"(源以光)가 되었으며, 도사국으로의 배류가 결정되었다. 그날 밤, 검비위사의 도키 미쓰나가와 미나모토노 카네쓰나(요리마사의 아들)가 이仁王의 관저를 습격했지만, 카네쓰나는 요리마사에게 이 움직임을 급히 보고했으며, 이仁王은 이미 참배를 위장하고 탈출한 상태였다. 5월 16일이 되자 이仁王이 온조지에 도망친 것이 판명되었고, 5월 21일에 헤이시는 온조지에 대한 공격을 결정한다. 그중 대장에는 요리마사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 시점에서는 헤이시는 이仁王 단독의 모반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요리마사는 그날 아들들을 이끌고 온조지에 들어가 이仁王과 합류했다. 그러나 온조지와 대립하고 있던 엔랴쿠지의 협력을 얻을 수 없었고, 또한 온조지 내에서도 친 헤이시 파가 적지 않아, 이대로는 승산이 얇다고 판단한 이仁王과 요리마사는 난토(南都)의 사찰 세력을 의지하기로 결정했다.
지쇼 4년(1180년) 5월 26일, 요리마사가 우지에서 방어전을 펼쳐 시간을 버는 동안 이仁王은 고후쿠지로 향했지만, 같은 날 난잔조(南山城)의 카바타가와라(加幡河原)에서 헤이시 가신의 후지와라 카게타카・이토 타다쓰나 등이 이끄는 추토군에게 따라잡혀 토벌당했다. 《헤이케 이야기》는, 히다노카미 카게이에의 군세에 의해 코묘산(光明山) 도리이(鳥居) 앞에서 토벌당했다고 한다.[2]
하지만 왕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적었고, 동국생존설이 세상에 퍼졌다. 모치히토 왕 본인의 평씨 토벌 계획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영지를 받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나 기소 요시나카 등 각지의 겐씨가 거병하여 이것이 평씨 멸망의 실마리가 되었다. 조정은 당초 이 영지를 가짜로 생각했지만, 나중에 이것이 진짜라는 의혹이 생겼고, 게다가 모치히토 왕이 다카쿠라 천황(모치히토 왕의 동생) 및 안토쿠 천황(모치히토 왕의 조카)을 대신하여 즉위할 것을 암시하는 문장이 포함되어 있어 강하게 반발했다.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다카쿠라 천황은 치천의 권위로 자신이 선택한 후계자였으며, 그 자손에게 황위를 계승시키는 것은 교토의 공가 사회에서는 공통의 인식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교토에서는 모치히토 왕의 행동이 차츰 황위 찬탈을 꾀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난으로부터 16년이 경과한 겐큐 7년(1196년)이 되어도 모치히토 왕은 '형인'이라고 칭해져 모반자로서 취급받고 있다(《교쿠요》 겐큐 7년 정월 15일 조).[2]
제1 왕자인 호쿠리쿠노미야는 요시나카에게 도망쳐 그의 기수로 받들어졌고, 제2 왕자인 와카미야는 평씨에게 붙잡혀 도손이라고 칭하며 불문에 들어갔다. 하치조인 산위국(다카시나 모리아키의 딸)이 낳은 왕녀인 산조노미야 히메노미야는, 겐큐 7년(1196년)에 하치조인으로부터 안라쿠주인·칸키코인 등을 1기분으로서 양여받았다.
3. 모치히토 왕의 영지
모치히토 왕의 영지는 《아즈마카가미》, 《헤이케 이야기》 등에 실려 있으나, 사료마다 형식과 문체에 차이가 있고 미흡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이 영지들은 헤이케 타도와 모치히토 왕 자신의 즉위를 선언하는 공통된 내용을 담고 있다.[8]
모치히토 왕은 온조지로 피신한 후 또 다른 문서를 작성했는데, 이것이 진정한 헤이케 타도 영지일 가능성이 있다. 《구칸쇼》에는 모치히토 왕 체재 중 '궁선'(宮宣)이 나왔다는 기록이 있고, 《헤이케 이야기》에는 미나모토노 유키이에가 이세 신궁에 봉납한 원문에 '최승친왕의 칙'이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4월 9일 영지와 유사하며, 5월 15일 왕자의 온조지 피신 내용까지 담고 있어, 유키이에의 활동 기반이 된 영지는 왕자가 온조지로 피신한 직후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7]
모치히토 왕의 헤이케 타도 계획은 실패했으나, 그의 영지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기소 요시나카 등 각지 겐지의 봉기 계기가 되어 헤이케 멸망의 시발점이 되었다. 교토 조정은 처음 영지를 가짜로 여겼으나, 진본임을 확인 후 왕자가 다카쿠라 천황, 안토쿠 천황을 제치고 즉위하려 했다는 내용에 반발했다.[9]
3. 1. 영지의 내용
모치히토 왕자의 영지 원문은 《아즈마카가미》나 《헤이케 이야기》 등에도 실려 있는데, 영지로서의 형식에 미흡한 부분이 많고 사료에 따라 문체도 다르다. 내용은 스스로를 진신의 난에서의 덴무 천황에 비기면서 왕실과 조정을 농간하는 헤이케를 타도하고 자신이 제위를 잇겠다는 선언이다.《아즈마카가미》는 지쇼 4년(1180년) 4월 이즈에 유배되어 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모치히토 왕자의 영지가 도착하는 데서부터 서술을 시작하며, 《헤이케 이야기》에는 모치히토 왕자를 만난 요리마사가 전국의 겐지들로써 믿을 만한 자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은 미나모토노 미쓰노부(源光信, 미노 겐지), 다다 유키쓰나(多田行綱, 다다 겐지), 야마모토 요시쓰네(山本義経, 오미 겐지), 다케다 노부요시(武田信義), 이치조 다다요리(一条忠頼), 야스다 요시사다(安田義定, 가이 겐지), 이즈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무쓰의 미나모토노 요시쓰네 등이다. 그러나 실제 당시의 중요 인물이 빠져 있는가 하면 착오도 많아서 후세의 창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편으로 모치히토 왕자가 온조지로 달아난 뒤 한 통의 문서를 더 작성했는데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헤이케 타도의 영지일 가능성이 지적된다. 이것은 《구칸쇼》에서 모치히토 왕자가 체재하고 있는 동안 「궁선」(宮宣)이 나왔었다는 기술이나, 《헤이케 이야기》에서는 하치조인의 구란도이자 미나모토노 다메요시의 막내아들로 구마노에 숨어 살다 모치히토 왕자의 명을 받들어 전국의 겐지들에게 왕자의 영지를 전달하는 임무를 명받았다는 미나모토노 유키이에(源行家)가 5월 19일에 이세 신궁에 봉납했다고 서술한 원문(願文)에서도 「최승친왕의 칙(勅)」이라는 것이 등장하며, 4월 9일의 영지와 유사한 부분이 있을 뿐 아니라 5월 15일에 왕자가 온조지로 달아났다는 것까지 인용되어 있다. 즉 유키이에가 토대를 두고 활동한 모치히토 왕자의 영지란 왕자가 온조지로 달아난 직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영지의 선자(宣者)로 되어 있는 미나모토노 나카쓰나(源仲綱, 요리마사의 아들)는 작성 날짜로부터 조금 뒤 요리마사 등이 합류한 22일 이후에야 모치히토 왕에게 가담했다는 점에서 다소 모순이 있지만, 「최승친왕의 명」 ・ 「이치노인(一院) 제3친왕의 선명」이라는 명령서가 왕의 사후에도 유포되었다는 것이 구조 가네자네의 일기 《교쿠요》나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의 일기 《메이게쓰기》에도 등장하는 점,[7] 4월 9일의 영지는 창작일지 몰라도 왕자가 온조지로 들어간 뒤에 「모치히토 왕의 영지」라 불릴 만한 문서가 제작되었고 이것이 《아즈마카가미》보다 앞서 성립된 《헤이케 이야기》에 삽입된 영지의 모델이 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모치히토 왕자 자신의 헤이케 타도 계획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영지를 받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나 기소 요시나카 등 각지 겐지들이 잇따라 병사를 일으켰으며 이는 헤이케 멸망의 시발점이 되었다. 한편 당시 교토 조정은 당초에 모치히토 왕자가 내렸다는 영지 자체를 가짜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가서야 영지 자체는 진짜라는 것이 밝혀졌고, 나아가 왕자 자신이 동생 다카쿠라 천황이나 조카 안토쿠 천황을 제치고 즉위할 것이라는 문장이 담긴 것을 보고 반발했다고 한다.[8] 반란이 일어나고 16년이 지난 겐큐(建久) 7년(1196년)까지도 모치히토 왕자는 「형인」(刑人)이라 불리며 모반자 취급을 받았다.[9]
3. 2. 영지의 역사적 의의
모치히토 왕의 영지 원문은 《아즈마카가미(吾妻鏡)》나 《헤이케 이야기》 등에도 실려 있는데, 영지로서의 형식에 미흡한 부분이 많고 사료에 따라 문체도 다르다. 그 내용은 스스로를 진신의 난(壬申の乱)에서의 덴무 천황(天武天皇)에 비유하며 왕실과 조정을 농간하는 헤이케를 타도하고 자신이 제위를 잇겠다는 선언이다.《아즈마카가미》는 1180년 4월 이즈(伊豆)에 유배되어 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에게 모치히토 왕의 영지가 도착하는 데서부터 서술을 시작한다. 《헤이케 이야기》에는 모치히토 왕자를 만난 요리마사가 전국의 겐지들로써 믿을 만한 자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은 미나모토노 미쓰노부(源光信, 미노 겐지美濃源氏), 다다 유키쓰나(多田行綱, 다다 겐지多田源氏), 야마모토 요시쓰네(山本義経, 오미 겐지近江源氏), 다케다 노부요시(武田信義), 이치조 다다요리(一条忠頼), 야스다 요시사다(安田義定, 가이 겐지), 이즈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무쓰(陸奥)의 미나모토노 요시쓰네(源義経) 등이다. 그러나 실제 당시의 중요 인물이 빠져 있는가 하면 착오도 많아서 후세의 창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모치히토 왕이 온조지로 달아난 뒤 한 통의 문서를 더 작성했는데,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헤이케 타도 영지일 가능성이 지적된다. 이는 《구칸쇼(愚管抄)》에서 모치히토 왕이 체재하고 있는 동안 '궁선'(宮宣)이 나왔었다는 기술이나, 《헤이케 이야기》에서 하치조인의 구란도이자 미나모토노 다메요시의 막내아들로 구마노에 숨어 살다 모치히토 왕의 명을 받들어 전국의 겐지들에게 왕자의 영지를 전달하는 임무를 명받았다는 미나모토노 유키이에(源行家)가 5월 19일에 이세 신궁(伊勢神宮)에 봉납했다고 서술한 원문(願文)에서도 '최승친왕의 칙(勅)'이라는 것이 등장하며, 4월 9일의 영지와 유사한 부분이 있을 뿐 아니라 5월 15일에 왕자가 온조지로 달아났다는 것까지 인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지의 선자(宣者)로 되어 있는 미나모토노 나카쓰나(源仲綱, 요리마사의 아들)는 작성 날짜로부터 조금 뒤 요리마사 등이 합류한 22일 이후에야 모치히토 왕에게 가담했다는 점에서 다소 모순이 있지만, '최승친왕의 명' ・ '이치노인(一院) 제3친왕의 선명'이라는 명령서가 왕의 사후에도 유포되었다는 것이 구조 가네자네의 일기 《교쿠요》(玉葉)나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의 일기 《메이게쓰기》(明月記)에도 등장한다.[7] 4월 9일의 영지는 창작일지 몰라도 왕자가 온조지로 들어간 뒤에 '모치히토 왕의 영지'라 불릴 만한 문서가 제작되었고 이것이 《아즈마카가미》보다 앞서 성립된 《헤이케 이야기》에 삽입된 영지의 모델이 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모치히토 왕 자신의 헤이케 타도 계획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영지를 받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나 기소 요시나카(木曾義仲) 등 각지 겐지들이 잇따라 병사를 일으켰으며 이는 헤이케 멸망의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 교토 조정은 당초에 모치히토 왕이 내렸다는 영지 자체를 가짜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가서야 영지 자체는 진짜라는 것이 밝혀졌고, 나아가 왕자 자신이 동생 다카쿠라 천황(高倉天皇)이나 조카 안토쿠 천황(安徳天皇)을 제치고 즉위할 것이라는 문장이 담긴 것을 보고 반발했다고 한다.[8] 반란이 일어나고 16년이 지난 1196년까지도 모치히토 왕은 '형인'(刑人)이라 불리며 모반자 취급을 받았다.[9]
4. 사후
아무도 왕자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기 때문에, 모치히토 왕은 사실 죽지 않고 도고쿠(東国)로 달아났다는 설도 있었다. 《구칸쇼》에는 왕자로 추정되던 시신의 목을 베어다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준 가운데 왕자의 학문 스승 후지와라노 무네나리가 왕자의 목이 맞다고 하였으며, 《헤이케 이야기》에는 모치히토 왕자의 총애를 받아 그의 아이까지 낳은 궁녀가 목 앞에 꿇어 앉아 통곡하는 모습을 보고 틀림없는 모치히토 왕자의 목임을 확인했다고 한다.[2]
하지만 왕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적었고, 동국생존설이 세상에 퍼졌다. 모치히토 왕 본인의 평씨 토벌 계획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영지를 받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나 기소 요시나카 등 각지의 원씨가 거병하여 이것이 평씨 멸망의 실마리가 되었다. 조정은 당초 이 영지를 가짜로 생각했지만, 나중에 이것이 진짜라는 의혹이 생겼고, 게다가 모치히토 왕이 다카쿠라 천황(모치히토 왕의 동생) 및 안토쿠 천황(모치히토 왕의 조카)을 대신하여 즉위할 것을 암시하는 문장이 포함되어 있어 강하게 반발했다.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다카쿠라 천황은 치천의 권위로 자신이 선택한 후계자였으며, 그 자손에게 황위를 계승시키는 것은 교토의 공가 사회에서는 공통의 인식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교토에서는 모치히토 왕의 행동이 차츰 황위 찬탈을 꾀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난으로부터 16년이 경과한 겐큐 7년(1196년)이 되어도 모치히토 왕은 '형인'이라고 칭해져 모반자로서 취급받고 있다.
제1왕자인 호쿠리쿠노미야는 요시나카에게 도망쳐 그의 기수로 받들어졌고, 제2왕자인 와카미야는 평씨에게 붙잡혀 도손이라고 칭하며 불문에 들어갔다. 하치조인 산위국(다카시나 모리아키의 딸)이 낳은 왕녀인 산조노미야 히메노미야는, 겐큐 7년(1196년)에 하치조인으로부터 안라쿠주인·칸키코인 등을 1기분으로서 양여받았다.
5. 자손
자손|자손일본어
- 아버지: 고시라카와 천황
- 어머니: 후지와라노 나리코 (후지와라노 스에나리의 딸)
- 부인: 하치조인 뇨보
- 아들: 호쿠리쿠노미야 (1165년-1230년)
- 부인: 후지와라노 타다나리의 딸
- 아들: 신쇼 (1167년-1230년)
- 부인: 하치조인 산미노츠보네 (타카시나 모리마사의 딸)
- 아들: 도손 (1175년-1228년)
- 딸: 산조노미야 히메노미야 (?-1204년)
- 부인: 인부몬인 지부쿄쿠
- 아들: 도쇼 (안인노미야 승정)
- 딸: 히메노미야
- 생모 불명
- 아들: 닌요
- 아들: 호엔 (1178년-1231년)
모치히토 왕자의 첫째 아들 호쿠리쿠노미야는 요시나카에게 의탁했고, 둘째 아들 와카미야(若宮)는 헤이케에 잡혀 도손(道尊)이라는 법명으로 출가했다. 하치조인 산미노츠보네(八条院三位局, 다카시나노 모리아키라(高階盛章)의 딸)가 낳은 딸 산조노미야 히메노미야(三条宮姫宮)는 겐큐 7년(1196년)에 하치조인에서 아란쿠슈인(安楽寿院) ・ 겐기코인(歓喜光院) 등을 일부 상속받았다.[2]
6.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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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관련 유적
모치히토 왕을 주신으로 모시는 신사로는 다카쿠라 신사(교토부키즈가와시 야마시로정 소재), 다카쿠라 신사(교토부아야베시 소재), 다카쿠라 신사(후쿠시마현미나미아이즈군시모고마치 오우치주쿠 소재) 등이 있다.[1]
7. 1. 묘소
교토부 키즈가와시에 있는 타카쿠라 신사에는 모치히토 왕이 모셔져 있으며, 경내에는 후세에 마을 사람들이 신사 경내에 묻었다고 전해지는 왕의 묘라고 전해지는 능묘가 있다. 신사 근처에는 츠츠이 죠묘 묘라는 묘가 있으며, 이 묘도 모치히토 왕 묘의 배총으로서 왕묘와 함께 궁내청이 관리하고 있다.7. 2. 신사
모치히토 왕을 주신으로 모시는 신사는 다음과 같다.[1]8. 관련 전승
- 니가타현 나가오카시(구 오구니정)에는 모치히토 왕이 헤이시에게서 도망칠 때 에치고국 오구니고에 도착하여 거기서 생활했다는 전승이 있다.
- 나가노현 기소군 아게마쓰정의 오가와 일대에는 모치히토 왕의 공주에 관한 전승이 있다. 공주는 모치히토 왕이 기소 계곡에 잠복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몰래 기소 계곡을 향했지만, 아게마쓰에서 헤이시에게 발각된다. 공주는 오가와 상류로 도망치지만, 가지고 있던 사향 주머니 냄새 때문에 발각되어 깊은 연못에 몸을 던져 죽는다. 오가와에는 "사향자와", "히메부치" 등의 지명이 남아 있으며, 사향자와 근처에는 히메미야 신사(다카쿠라 하치만 신사)가 모셔져 있다.
9. 관련 작품
- 신・헤이케 이야기 (1972년, NHK 대하 드라마) - 배우: 키타오지 킨야
- 요시츠네 (2005년, NHK 대하 드라마) - 배우: 오카 코우지로
- 타이라노 키요모리 (2012년, NHK 대하 드라마) - 배우: 카키자와 하야토
- 가마쿠라 시대의 13인 (2022년, NHK 대하 드라마) - 배우: 키무라 스바루
- 헤이케 이야기 (2022년, 후지 TV) - 성우: 후지와라 다이치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Japan to 1334
https://archive.org/[...]
Stanford University Press
[2]
논문
八条院領の伝領と八条良輔
吉川弘文館
[3]
PDF
赤沢自然休養林「姫渕」
https://www.pref.nag[...]
長野県
2016-01-06
[4]
웹사이트
赤沢散策マップ
https://web.archive.[...]
上松町観光協会
2016-01-06
[5]
문서
교토 산젠인(三千院)의 다른 이름으로 몬제키란 일본에서 황족이나 귀족이 주지를 맡는 특정 사찰 또는 그 사찰의 주지를 가리킨다. 당시 산젠인의 문적은 묘운(明雲)이었다.
[6]
서적
城興寺のゆくえ
吉川弘文館
[7]
문서
다만 두 사람 모두 왕자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설에 기반해 영지 자체를 가짜라고 비판하고 있으며, 실물을 본 것은 아니다.
[8]
문서
두 천황 모두 고시라카와 법황 자신이 치천의 군으로써 지목한 후사였고, 마땅히 그 자손에게 제위가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당시 교토의 귀족 사회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때문에 모치히토 왕자의 행동은 찬탈 시도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9]
문서
《교쿠요》 겐큐 7년 정월 15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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